미술사

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러블리 리리 2024. 7. 2. 23:20

16세기 후반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예수회 교단의 교회 도판에서 바로크 양식의 건축이 시작됐고 델라 포르타는 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 고전적의 건축의 틀을 무시하였다. 따라서 미술가들은 계속해서 인상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더 복잡한 장식과 더 독특한 생각을 고안했다. 17세기 전반 이탈리아에서 건물과 그 장식에 대한 더욱 눈부신 새로운 구상들이 축적되어 17세기 중엽엔 바로그라는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보르미니는 더 이상 고전 건축에서 따온 기둥 양식을 가지고 벽을 장식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거대한 둥근 지붕을 만들고 그 양쪽에 두 개의 탑과 정면을 세움으로 해서 다른 형태들을 한데 모아 그의 교회를 구성했다. 정면은 마치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처럼 굴곡이 져있다. 세부를 들여다보면 더욱 놀라운 효과들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탑 아래층은 사각형이고 위층은 원형이며 이 두 개의 층이 이상하게 파괴된 엔타블레이처로 연결되어 있다.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르미니가 건립한 전형적 바로크 양식의 교회다. 이 교회당을 보면 보로미니가 채용한 것이 사실은 르네상스 형태다. 델라 포르타처럼 그는 중앙 입구를 고대 신전의 정면 형태로 만들고 풍부한 효과를 살리기 위해 양쪽으로 벽기둥의 수를 배로 늘렸다. 그러나 보다 풍부한 효과를 살리기 위해 양쪽으로 벽기둥의 수를 배로 늘렸다. 그러나 보로미니 정면과 비교해 보면 델라 포르타의 정면은 다소 엄격하고 절제된 것처럼 보인다. 

바로크 양식의 소용돌이 장식과 곡선이 건물의 전반적 설계와 장식적인 세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은 지나치게 장식이 많고 과장되어 있다. 보로미니 자신은 이같은 비난을 이해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는 교회가 축제처럼 흥겹게 보이고 화려함과 운동감이 가득한 건물이 되기를 원했다.

빛과 화려한 구경거리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계에 관한 환영으로 즐겁게 만드는 것이 극장의 목적이라면 교회를 설계하는 건축가가 천상을 연상시키는 장관과 영광의 느낌을 줄 수 있는 권리 또한 있다.

이 교회 내부로 들어가보면 중세 성당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청산의 영광을 연상시키기 위해 얼마나 신주이 보석과 황금과 스터코(치장벽토) 등으로 호화스러운 장관을 연출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신교가 교회의 외면적 치장에 반대하는 설교를 할수록 로마교회는 더욱 열렬하게 미술가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이리하여 종교 개혁과 과거에 그처럼 자주 미술의 진로에 영향을 끼쳤던 우상 숭배라는 문제들이 바로크 양식의 발전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미술은 글을 못 읽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해서 개종하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교회당 내부에서 중시되는 것은 세부가 아닌 교회 전체의 효과이다. 베르니니는 보로미니 같은 세대로 반 다이크와 벨라스케스 보다 한 살 위였고 렘브란트보다는 여덟 살 위다. 성 테레사의 환희는 로마에 있는 교회의 부속 예배실 장식을 우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한 된 것이다. 성 테레사는 16세기 수녀로 그녀가 본 신비르서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베르니니가 표현하고자 한것이 바로 이 순간이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고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희열과 충만됨을 느꼈다고 설명한다. 이런 화려한 미술을 잔 로렌초 베르니니라는 미술가에 의해 발전되었다.

 

베르니니의 성 테래사 같은 조각 작품은 놓인 장소까지 포함하여 관람해야만 진가가 드러난다.

 

바로크 교회의 회화장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베르니니를 추종하던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카울리가 그린 로마의 한 예수회 교회의 천장장식으로 <예수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함> 작품이 있다.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인태리어 디자이너 할 수 있다. 세공 및 대형 프레스코에 대해 유럽 전체으로 유명하였다. 

베네치아 출신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1696-1770)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독일과 스페인에서도 활동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연회>는 그가 1750년 경 그린 베네치아 궁전 장식이다. 이 그림은 티에폴로에게 화려한 색채와 호사스러운 의상 묘사를 과시할 모든 기회를 준 주제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사치에 달한 향연을 베푼다는 이야기로 값비싼 산해진비 요리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지만 클래오파트라는 감명을 받지 않는다.

 

그녀는 자부심이 강한 주인 안토니우스에게 자기는 그가 지금까지 제공한 어떤 음식을 줄 수 있다 장담한다. 그녀는 귀걸이에서 진주를 떼어내어 그것을 식초에 녹여 마셨다. 티에폴로의 프레스코는 그녀가 안토니우스에게 진주를 보여주고 한 흑인 하인이 그녀에게 유리잔을 내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보기에도 매우 즐겁다. 

18세기 초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 분야에서 새로운 이념들이 창조되었다. 이탈리아의 여행객들은 기념품을 원했고 특히 그 경치가 화가를 매혹시킨 베네치아에서는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는 유파가 생겨났다.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정경>은 프란체스코 구아르디가 그린 베네치아의 한 풍경이다. 이 프레스코는 풍경화도 베네치아 미술의 그 특유 화려함과 빛과 색채의 감각을 잃지 않음을 보여준다. 구아르디가 그린 물의 도시 베네치아의 정경과 그보다 1세기 전 네덜란드의 지목 데 블리헤르가 그린 수수하고 성실한 바다 풍경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구아르디는 17세기 화가들이 연구했던 이 효과를 몸에 익혀 한 장면의 일반적인 인상만 제공해주면 나머지의 사소한 세부들은 보는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메꾸고 보충하려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러한 후기 이탈리아 미술의 결실 속 바로크양식은 후대에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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