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라고 부르는 네덜란드의 남부지역은 당시 가톨릭이다.
네덜란드 북쪽지방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신교를 믿었다. 네덜란드의 신교를 믿는 상인들의 취향은 가톨릭을 믿는 나라들과 달랐다. 이들은 영국의 청교도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유럽의 가톨릭 국가이 선호하는 바로크 양식은 좋아하지 않았다.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하였다. 도시가 점차 안정된 기반을 확보해 가고 그들은 부가 축적됨에 따라 그들의 세계관도 성숙해 갔다.
건축에 있어도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하였다. 네덜란드의 번영이 절정기인 17세기 중엽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은 새로 탄생한 그들의 국가에 자부심과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 시청사를 짓기로 했다. 그들이 선택한 모델은 크고 당당하지만 형태는 단순하고 장식도 별로 없는 건축 양식이었다.
장인정신과 전통이 강했던 네덜란드도 화가들은 종교적 견지에서 아무런 이의가 없던 회화의 특정 영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신교사회에서 계획될 수 있었던 이런 회화의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 초상화 그리기였다.
네덜란드 도시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방 위원회 및 자치단체의 임원들은 회의실 등 모든 장소에 초상화를 자랑삼아 걸어놓는 관습을 따르고 있었다.
많은 부유한 상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어 했고, 시장과 상의원 등 명사들도 그들의 직위가 나타내는 표지가 들어있는 초상화를 원했다.
이런 고객들의 취향에 맞도록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비교적 안정된 수입을 기대할수 있었지만 그의 양식이 유행에 뒤지게 되면 몰락하기 마련이었다.
신교는 건축보다는 회화에 더 영향을 많이 미쳤다. 중세 유럽의 다른 지역 못지 않게 미술이 번창했던 영국과 독일에서도 이 미술의 위기 상황은 매우 심각하여 화가나 조각가라는 직업이 그 나라의 재능이 있는 젊은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신생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출현한 거장은 파란스 할스(1580-1666)다. 그의 부모는 신교도였고 가톨릭 권인 네덜란드 남부지역을 떠나 네덜란드의 부유한 도시 하를럼에 정착했다.
그는 여든 살 이상을 살았는데 말년에 시립 양로원이 제공하는 적은 수입으로 살며 양로원 이사들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그는 방가게나 구둣방 주인에게 가끔 돈을 빌려 썼다는 식의 것 이외에는 들어가지 알려진 바는 없다. <성 조지 시민군단 장교들의 연회>는 거의 초창기에 그린 작품으로 그는 이런 종류의 주문 그림을 그릴때 구사한 빼어난 솜씨와 독창력을 잘 보여준다.
자랑스럽게 독립한 네덜란드 여러 도시들의 시민들은 대게 가장 부유한 주민들의 지휘하에 차례로 군복무를 해야 했다. 임무를 할당해 맡은 각 부대들의 장교들을 위해 호사스러운 연회를 베버리는 것이 당시 하를럼 시의 관습이었고 이 순간을 거대한 그림으로 남겨 기념하는 것도 전통이 되었다.
미술가는 많은 인물들을 딱딱하거나 어색해 보이지 않게 하나의 틀 속에 그려 넣어야 했는데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할스는 처음부터 그 유쾌한 순간의 분위기를 전달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2명의 구성원 개개인을 드러내 보여줘야 하는 목적에 소홀함 없이 각각의 인물을 너무나 실감 나게 묘사하였다. 할스와 그의 가족에게는 조그마한 수입밖에 되지 못한 수많은 개인 초상화 들 중 하나인 <피터 반 덴 브루케 추상>을 보면 그의 능란한 솜씨를 더욱 잘 볼 수 있다. 할스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면 이 작품은 거의 스냅사진이다.
17세기 무역 상인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같게 된다. 한 세기 전에 그린 홀바인의 리처드 사우스웰 결의 초상화라던가 같은 시기의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 그려진 루벤스와 반 다이크 또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자. 그들이 그린 초상화들은 모두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긴 하지만 주문한 사람의 위엄과 귀족적인 혈통을 암시하기 위해 화가는 주문자와 자세에 세심히 배려하였다.
중세나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달리 그들은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구매자를 찾아나서야 했다.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의 화가들 중 초상화를 그리는 소질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주로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오늘날은 당연히도 이런 시스템이라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거의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화가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네덜란드의 각 도시에는 점포에 그림을 진열하고 파는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별로 이름이 없는 군소 화가가 명성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대중들은 어느 분야의 그림에서 누가 유명한 작가인지를 관심있어 했다.
어떤 화가가 일단 전쟁화를 잘 그려 이름을 알리게 되면 그 화가는 전쟁화는 쉽게 팔렸다.
만약 그가 달빛 아래의 풍경화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만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 좋았다. 16세기 북유럽의 나라에서 시작된 전문화의 경향이 17세기 와서는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미술사상 위대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렘브란트 반 레인(1606-69)이다. 그는 프란스 할수나 루벤스보다 한 세대쯤 후의 인물이고 반 다이크나 벨라스케스보다 일곱 살 아래였다.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나 뒤러처럼 그가 관찰하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는 미켈란젤로처럼 후세까지 그의 말이 전해지는 존경받는 천재도 아니었다. 또 당시의 지도적인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던 루벤스처럼 달필의 외교 사절단도 아니었다.
렘브란트는 1606년 대학 도시 레이덴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얼마 안가서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포기했다. 그 당시 학자들은 그의 초기 작품을 크게 칭찬했다. 그는 스물다섯이던 해 레이덴을 떠나 상업의 중심지인 번잡한 도시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거기에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부유한 집 딸과 결혼을 하고 집을 장만하여 미술품과 골동품들을 수집하며 쉬지 않고 작업했다.
1642년 그의 첫 부인이 사망하면서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에 대한 렘브란트의 인기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14년 후 그의 채권자들이 그의 집을 팔고 그의 수집품들을 경매에 부쳐서 처분해 버렸다. 다만 그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의 도움으로 완전한 몰락의 지경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미술품을 거래하는 회사를 형식 하여 그를 회사의 고용인으로 만드는 형식적 협정을 하였다. 그 덕분으로 그는 만년 위대한 걸작을 그려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보다 먼저 죽고 말았고, 1669년 그의 인생이 막을 내렸을 때 그는 헌 옷 몇 벌, 그림 그리는 화구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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