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바로크 양식이 꽃핀 배경에는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분쟁(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 )의 영향이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가톨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개축공사가 발단이 되었다.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막대한 재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했다.
대사의 조건으로 헌금을 제시하는 문제는 15~16세기 독일 지방에서 논란이 되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15세기초 교회분열을 마감하고 다시 로마로 교황청이 귀환한 형편에 로마시가 몰락해 있었다. 게다가 로마 재건 사업과 성 베드로 대성당 축조, 교황령의 전쟁 비용 등으로 재정이 어려워졌다.
이러한 조건의 대사는 루터의 고향인 독일에서 종교 개혁과 결부되어 유명해졌는데 한 사례로 1515년 당시 신성 로마 제국 7선제후 중 한 명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3] 요아힘 1세 네스토어의 동생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할버슈타트 주교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를 겸임하고 있었다. 교회법의 겸직금지와 나이제한은 교황청에서도 무시하고 있었는데 교황 레오 10세는 가문빽으로 13세에 추기경이 될 정도였다. 알브레히트는 2개의 교구의 수입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마침 신성 로마 제국 최고서열 선제후인 마인츠 대주교직이 매물로 나왔기에 2만 9천 두카트의 고액을 입찰해서 낙찰 받았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며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다. 성서를 절대적인 권위로 인정하는 복음주의 가치를 내건 프로테스탄트가 생겨났다.
종교개혁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국 국교회를 세우는 등 유럽사회를 양분하는 대사건이 된다. 성경에 나오는 십계명 중 하나인 우상 숭배 금지에 따라 종교미술을 부정하는 신교도가 가톨릭 성당이나 수도원의 종교미술을 파괴하는 성상파괴 운동을 주도한다.
그 무렵 가톨릭교회의 내부 상황을 들여다보면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도 당연하다. 당시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는 왕과 같은 권력과 재력을 움켜주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바로크 시대에 걸쳐 역대 로마 교황은 배부분 이탈리아 명문가 출신으로 현대인의 상상하는 로마 교황과의 이미자와 다르다.
게다가 교황의 조카나 양자, 그 자손을 추기경으로 추대하는 등 네포티즘(족벌주의)이 있었다. 세습제로 운영되는 왕족 정치를 불신하듯 족벌주의에 휘둘리며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는 가톨릭교회와 교황에게 많은 유럽인은 실망했다. 실제로 권력을 가진 성직자들은 타락한 생활을 하였고 이런 부패상황을 북유럽 상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절대 권위라는 프로테스탄티즘이 호응을 얻었다.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는 반격했다. 베네치아 미술의 거장인 티치아노를 후원한 교황 바오르 3세가 1540년에 예수회를 공인하고 전 세계로 사제들을 보내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아시아 까지 방문했고 예수회의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인도와 중국을 거쳐 1549년부터 일본에도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바오르 3세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트렌토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부정하고 로마 교황청의 개혁을 단행했다. 프로테스탄트의 활동을 견제하고 동시에 가톨릭교회도 혁신운동(반종교개혁)을 추진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총 25회에 걸쳐 진행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종교미술 자체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상 숭배 금지의 계명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술표현의 경우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묘사와 고상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논의되었다. 종교미술에 엄격한 태도를 보이며 부정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와 반대로 가톨릭은 미술의 힘에 더욱 기대려 했던 것이다.
당시 주류였던 매너리즘 미술은 종교미술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 예술의 변화를 시도했다.
'바로크 미술'이다. 바로크 미술을 감상해 보면 이전의 종교미술보다 감정과 감각에 호소하는 면이 많다. 성경중심의 신교와 달리 가톨릭교회는 글의 모르는 신도에게 신의 기적을 알리고 믿도록 해야 하는데 개인의 감정과 신앙심에 호소하는 미술이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성인 숭배를 꺼리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반동으로 가톨릭에서 수많은 성인의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다.
바로크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신의 영광, 교회의 승리를 알리고 가톨릭을 홍보하는 데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인데 이것이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 되었다.
신의 세계를 이상적으로 묘사한 라페엘로를 고전주의 접급방식에 대해 사실주의를 통한 혁신적 접근방식으로 유명한 인물은 카라바조이다.
밀라노 출신 카라바조는 베네치아 명문 귀족출신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이 후원하였는데 현재 이탈리아의 상원 의사당으로 쓰이는 마다마 궁전이 당시 델 몬테 추기경의 저택이다. 카라바조는 마다마 궁전에서 지내며 추기경의 미술 애호가 친구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했다.
카라바조는 처음 델 몬테 추기경을 위해 개인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추기경과 같은 이름의 성인을 주제로 삼은 성 프란체스코의 황홀경이라는 작품이 유명하다. 종교화이면서도 관능적 분위기를 자아내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혼재하는 바로크 미술의 출발점이라 생각된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빛과 어둠의 대비서 비롯 명암법은 카라바조 양식의 대명사가 되었다. 빛도 신이 곧 빛이다라는 종교 미술의 화법으로 신을 상징하는 성스러움 빛을 의미한다.
카라바조는 델 몬테 추기경의 추천으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콘타렐리 예배장을 장식하기 위해 성 마태 3부작을 그렸다. 이것은 그의 공식적 첫 작품이기도 했다. 카라바조는 철저한 사실주의 관점에서 성인을 투박하면서도 거친 현실의 남성으로 묘사하여 종교화의 기존 규칙을 뒤집었다.
이처럼 종교화라는 엄숙한 장르에도 혁신적이고 도발적인 카라바조의 표현은 논란에 가까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실적인 접근법과 관련해 찬반의견이 많았고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카라바조의 작품을 보러 성당에 몰려들었고 그의 명성과 화풍은 로마 전체로 펴졌다.
이후 작품 주문이 몰리면서 카라바조는 하루아침에 로마 미술계의 스타가 되었다.
카라바조 혁신 미술은 젊은 화가들에게 지지를 얻게 되었고 '라라바지스티'라는 추종자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 혁신적 기법이 로마뿐만 아니라 머무는 화가들 복제품과 추종자들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다만 카라바조의 작품 중 완성 이후 수용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실제 익사체를 모델 삼아 그린 성모의 죽음은 작품을 의뢰한 성당에서 제단화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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