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이탈리아가 꽃피던 시절 옛 네덜란드, 독일 등 알프스 산맥 북쪽 지역도 새로운 예술이 나타났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같은 시기에 나타났기에 북유럽 르네상스라고 구별한다.
북유럽이란 알프스 산맥을 기준으로 북쪽 전체 지역을 일컫는다. 북유럽 르네상스가 시작할 무렵 옛 네덜란드 지역은 프랑스 발루아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이 다스리는 부르고뉴 공국에 속해 있음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은 네덜란드 회화를 지칭한다.
유럽 르네상스에도 문예부흥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라는 명칭을 쓰고 있지만 중세고딕의 신 중심적인 정신세계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구분된다.
15,16세기 옛 네덜란드 지역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미술사뿐 아니라 유럽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벨기에 서부를 중심으로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남부에 걸쳐진 플랑드르 지방은 북해 무역의 거점이었으며, 항구도시 브루게를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했다. 모직물 산업을 중심으로 상공업도 발달해서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서 속한 브뤼셀 헨트 등과 같은 도시도 번창했다. 도시 경제가 발달함으로 교회, 종교 관계자뿐만 아니라 부유한 은행가나 상인 등 시민계층도 예술품 주문자가 되었다.
더욱이 부르고뉴 3대 공작이던 선량공 필리프(1396~1467)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를 디종에서 브위셀로 옮겼다. 궁정이 플라드르 지방으로 옮겨가자 플랑드르의 미술과 문화는 한층 발전했다. 이렇게 해서 플랑드르 지방을 중심으로 초기 네덜란드 회화의 빛나는 발자취가 미술사에 아로새겨진 것이다.
초기 플랑드르 회화의 특징은 당시 시민계층의 가장에 성모와 대천사 가브리엘 그림을 장식하는 식으로 '현실'을 중시한 시민의 인식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현실성은 사실성에 높은 실내 묘사로 이어져 상징주의를 발전시켰다. 요컨대 세속적인 일반 가정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꾸미기 위해 흰 백합은 순결, 수간은 청결과 순결, 촛불의 분꽃은 신, 개는 충정 등의 상징이 회화 예술에 도입되었다. 이런 사실성이 높은 정물 묘사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얀 반 에이크는 네덜란드/벨기에의 화가. 플랑드르 화파의 대표적인 선구자로서, 이후 전반적인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 사조에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유화라는 기법을 최초로 만들어 현재까지도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거장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인 헨트 제단화 나 재상 니콜라 롤랭의 성모를 자세히 살펴보면 실물처럼 보이는 왕관이나 보석, 의상의 옷감, 바닥의 타일 등 사물의 질감까지 매우 섬세하게 그려냈음을 알 수 있다.
헨트 제단화에서 15세기의 회화로 매우 드물게 아담과 하와를 인간다운 육체로 드러낸다. 게다가 살아 있는 나무나 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한 자연 묘사를 보면 똑같은 성경의 세계를 그리더라도 세계관이 관념적이면서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현세 및 자연계로 이동했다
얀 반 에이크가 브뤼해를 중심으로 활동한 궁정화가였다면,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인 브뤼셀에서 주로 활약한 대표 화가는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이다. 로히어르는 플랑드르의 남부 도시인 투르네 풀신의 화가이자 얀 반 에이크와 함께 초기 플랑드르 회화의 선구자로 알려진 로베르 캉팽의 제자였다.
"로베르 캉펭, 얀 반에이크,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은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3대 거장이다."
동시대의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플랑드르에서도 초상화가 크게 발달했다. 여러 도시가 경제적으로 번영했기 때문에 왕족과 귀족은 물론이고 부유한 시민들의 위해 '개인'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한 예술(초상화)이 탄생한 것이다. 도시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생활수준의 향상은 개인이라는 의식. 즉 자의식의 자각을 이끌었다.
도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들은 궁정에서 의뢰한 작품뿐 아니라 도시 경제를 좌지우지하며 도시 귀족이라고 일컬어진 대부호 일가의 예술품 주문도 도맡았다.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사물의 질감, 미묘한 빛 공기의 변화를 화폭에 세밀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 하는데 공헌한 플랑드르의 유화 기법은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15세기 이후의 회화 예술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는 이탈리아 미술에 특히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유화기법은 물론 사실감이 넘치는 풍경이나 정물 묘사, 초상화에서 답답해 보이는 측면상이 아닌 고개를 살짝 돌려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4분의 3 자세의 정면상 등 혁신적인 플랑드르 회화의 기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 완벽하게 스며들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이 이탈리아 회화에 정착한 본보기다.
플랑드르 회화(Flemish painting)는 15세기 초부터 17세기까지 번성한 저지대 국가 중부 일대의 회화를 말한다.
플랑드르 회화는 저지대 북부, 즉 근대 네덜란드 회화와 점차 구별되어 발달한 회화이다
플랑드르 회화의 초기는 1400년대부터 1520년경까지에 해당되며,저지대 국가 전 지역을 아울러 발달한 회화이다. 이는 곧 플랑드르파라고 칭하는데, 영어권에서는 보다 명확한 구분을 위해 '초기 플랑드르 회화', 혹은 저지대 전체를 아우른다는 점에서 '초기 네덜란드 회화'라고도 부른다. 이 시기 회화는 플랑드르 남부가 지배했지만 저지대 북부, 네덜란드 일대의 화가들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 시기 화가들은 유화 물감을 최초로 대중화하였으며, 후기 고딕시대 세밀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대표화가 : 얀 반 에이크, 한스 멤링, 휴고판데어구스, 로베르 캉펭,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이 있다. 이들 화가 행심 후원 쳐는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이었다.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 중 부르고뉴 지역은 프랑스 왕국에 병합, 네덜란드 지역은 담대공 샤를의 딸인 마리 드 부르고 뉴에 계 계승되었다. 마리가 합스부르크 대공이자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한 이후 옛 네덜란드 지역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렸다.
급변하는 정치로 플랑드르 지방은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브루게는 즈빈만에 모래가 쌓이면서 상선이 드나들 수 없게 되자 도시 발전도 멈췄다. 오늘날 브뤼헤는 천장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며 1500년경 화려한 경제의 모습을 간직한 관광지이다.
16세기 초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알프스 너머 플랑드르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과는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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