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르네상스

러블리 리리 2024. 6. 27. 16:51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 여러나라에서 일어났다고 생각되는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예 부흥 또는 문화 혁신 운동을 일컫는 용어

 

11~12세기 지중해 무역이 활발해짐으로써 유럽 경제는 활기를 띠게 된다.

상업이 번영하고 도시의 시민문화는 새로운 예술을 꽃피게 되는데 이것이 14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나서 유럽의 여러 나라로 퍼졌으며, 16세기까지 이어진 '르네상스'라 한다.

'부활''재탄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유럽에서 부정당했던 '고대그리스로마'의 학문과 예술을 부흥한다는 의미이다.

 

13세기 이후 도시경제가 발전한 이탈리아에서는 문화도 발달하는데 14세기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이 라틴어 및 그 원천이 되는 그리스의 학문과 문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의 활발한 연구를 통해 고대 문명이나 학문,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라틴어 문학이 널리 소개된 것이다. 라틴문학(고전문학)의 교양을 갖추는 일이 중요시되어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나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등 신화문학은 당시 엘리트층의 필수 교양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에서는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신화가 작품의 주제로 등장하고, 라틴어 문학의 지식을 구사한 분야 중 가장 심오하면서 격조 높은 알레고리 또는 우의는 어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그 유사성을 넌지시 드러내는 방법으로 풍유법의 발전이다. 그림으로는 '우의화'가 라 한다.

 

새로 발굴된 고대미술의 미의 본보기로 수집되어 문예부흥을 북돋웠다.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으로 '인간'의 지위향상과 인간 존중을 꼽을 수 있다. 작은 도시국가가 많은 이탈리아에는 자유와 독립을 향한 강렬한 열망과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비롯된 시민들의 위기의식이 '개인'이라는 자의식을 알게했다.

중세 이후 신과 종교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된 세계에서 다시 고대 그리스 로마와 같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오롯이 생각하는 세계로 바꿈 한 것이다.

 

상업의 발달과 함께 상인 계급도 문화발달에 크게 관여하게 되었는데 상인이나 중세 유럽에서 상인들이 결성한 동업자 조합인 길드가 예술의 후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피렌체나 베네치아 같은 공화국뿐 아니라 군주가 다스리던 공국도 있었는데 경제발전은 당연히 그 지역의 영주들에게 부를 주었고, 영주가 머무르는 궁정은 문화인이나 화가, 조각가들을 후원하는 장소로 부각되었다.

 

절대신에 맞서 인간의 독립이 시작했고 인간 중심의 시선으로 드러나게 됐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묘사한 중세 시대의 그림을 보면 십자가에 매달렸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추상적인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는 십자가  형벌이 죽음에서 부활한 승리한 예수를 형상화한 것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에 합당한 그림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14세기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예수의 십자가형 그림이 등장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를 그린 성모자 제단화에서도 성모와 예수뿐 아니라 인간이 아닌 천사까지 전통적인 무표정이 아닌 인간적 모습으로 그려졌다.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조토 디 본도네가 등장함으로 서양 회화는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조토가 그린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는 회화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준 작품으로 유명한데 마치 입체감이 느껴지는 조각상처럼 인물상이 역동적이고 감정묘사는 걱정이다. 예배당을 장식한 조토의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현대적 그림이었을 것이다. 

1348년 페스트(흑사병 :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의 뜻인 '검은 죽음의 병'을 그 정도로 답이 없고 무서운 비유적인 명칭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증상이다. 혈관 내에 피가 응고되어 부패하고 신체말단이 괴사하면서 실제로 피부와 근육이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의 대 유행으로 이탈리아에서 꽃피기 시작한 미술사는 잠시 멈춰야 했다. 하지만 15세기 이탈리아인들의 애정이 가득 콰트로첸토라고 부르는 시대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건축, 조각, 회화에서 다른 예술적인 움직임이 보였다. 이때 화가나 조각가 등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것이다. 손을 쓰는 노동자 신분에서 기능인으로 문화인, 지적 예술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이나 조각처럼 단지 한 분야에만 능력을 쓰는 미술가는 여전히 하급 기술자로 대접을 받았고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어야 예술가로 대접받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피렌체 공화국의 예술가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등 다방면에서 완벽에 가깝게 두루 활약한 자타공인 다중천재(Polymath)이며, 키, 외모, 목소리 등 외적 용모 또한 뛰어났다. 또한 운동을 즐겨 강인한 완력과 쉽게 지치지 않는 근골격계를 가졌으며, 검술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다재다능함과 창의성으로 르네상스 인간(Renaissance Man)이라 불릴 만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스스로 자기를 소개할 때 무기나 전쟁에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군사기술자로 자신을 부각하였고 조각과 회화의 기량을 갖고 있다는 강점을 강조했다. 레오나르도를 존경한 '라파엘로 산치오''도 레오나르도와 같이 화가 및 건축가로 활약하는 다재다능한 재능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으로 통하는데 미켈란 젤로는 조각가, 화가, 건축가, 공간 디자인까지 갖춘 르네상스인 이었다. 이와 같이 예술가는 모든 분야에 능통한 천재라는 인식과 함께 창작자의 정신이나 지성이 반영된 작품만 '상품'이 아닌 '예술품'으로 보았다. 16세기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예술 수업이 필수 과목이 되어 예술의 개념이 여러 유럽국가로 퍼져 나갔다.

 

천재 예술가에 열광하던 시기는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세명의 거장이 동시대에 활동하며 걸작을 쏟아냈고, 혁신적인 회화기법이 총동원되면서 르네상스 발전의 정점을 이룬 '전성기 르네상스'였다. 미켈란젤로는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들이 모이던 메디치 가를 통해 성장했다. 그는 당시 최고 징성인들의 모임인 플라톤아카데미에서 지적 대화와 토론을 펼치고 최고의 영재교육을 받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기능인에서 예술가로 향상되었음을 상징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시를 받고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다. 창세기를 주제로 인류의 탄생과 죽을을 표현한 대작이고 당초 교황의 주문은 예수를 따르던 12 사도의 그림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판단하에 걸작을 그려냈다. 이런 사실 자체가 기존 기술자의 지위에서는 절대 허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의 창조를 살펴보면 미켈란젤로는 신이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었더니 인간이 탄생했다는 성경구절을 신과 아담의 손가락이 서로 맞닿는 구도로 묘사하고 있다. 

 

아담의 창조를 포함한 것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대해 저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 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작품이라 칭찬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을 다 덮은 이 거대한 회화를 경이적인 속도로 마쳤다. 보통 화가들은 그 10분의 1의 크기인 벽화도 3년 동안 그렸지만 이 못생기고 왜소한 예술가가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4년, 다비드 상을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것도 남들을 훨씬 능가하는 자질을 보이며 끝내니 주변의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 거기에 벽화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천장화였다. 더군다나 그는 스스로를 조각가로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걸 계속 거부했었다. 교황의 계속된 협박과 달램 끝에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화 작업을 끝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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