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혁명적인 방법들은 재래의 인습적인 주문과 충돌할 때가 많았다.
건축의 경우에서 예를 들어 브루넬레스킹 생각은 그가 로마 유적에서 복제한 원주, 박공, 처마 장식띠와 같은 고전적인 건축 형식들을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 건물에 이런 형식들을 응용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런 점에서 그를 모방하려고 애썼다.
피렌체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설계한 교회인데, 그는 이 교회의 정면을 로마 풍의 거대한 개선문처럼 구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방침을 도시의 일반적인 주택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로마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개인주택은 하나도 없고 생활상의 필요와 관습이 변하기도 하여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문제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 건축가들에게 사용하라고 권장한 고전적인 형식을 절충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해결책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알베르티인데 그는 오늘날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알베르티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루첼라이 집안을 위해 대저택을 지었을 때 그는 통상적인 3층 건물을 설계했다. 이 건물의 정면과 고전 시대의 유적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그러나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계획에 따라 정면을 장식하는 데 고전적인 형식을 사용했다. 그는 원주나 반원주를 세우는 대신 건물의 구조를 변경하지 않고 고전적인 기둥의 양식을 암시하는 판판한 벽기둥과 에타블레이처를 그물처럼 엮어 건물 전체를 덮었다.
알베르티(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2.18.~1472.4.25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의 철학자이자 건축가 제자리에서 사람 키를 뛰어넘었다. 고대건축 연구, 바로크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가 어디에서 이러한 원리를 배웠는지 쉽게 짐작이 가는데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에도 제일 아래층에서는 도리아 식 기둥 양식을 채택하고 있고 또한 벽기둥 사이 아치를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형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옛 도시의 대저택에 현대적인 모습을 부여했다고 해서 알베르티가 고딕 전통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이 대저택의 창문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정면에 있는 창문들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알베르티는 소위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고전적 기둥 양식의 요소를 재래의 인습적 형식 안에서 채택함으로 변경했다.
알베르티 이런 업적은 전형적이다. 15세기 피렌체 화가나 조각가들은 새로운 것과 오래된 전통에 맞도록 조화시켜야 하는 처지에 놓일때가 많았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고딕 전통과 근대 양식 사이 절충은 15세기 중엽 많은 거장의 특징이다.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은 처음 보아서는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은 없다. 세례받는 그리스도 1427년 청동에 금도금 시에나 대성당 세례당의 세례반 부조는 12세기 레이주의 유명한 놋쇠 주물공의 배치 방식과 많이 다르지 않다. 예수는 세례 요한과 구원의 천사들을 데리고 중앙에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비둘기는 하늘에 새겨져 있다. 세부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 기베르티 작품은 중세의 선구자들의 수법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그가 옷주름을 배치하는 데 쏟은 세심한 주의는 14세기 금세공사의 작품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기베르티의 부조는 그런대로 도나텔로의 작품만큼 힘차고 실감 나게 보인다. 도나텔로처럼 기베르티도 각 인물상에 특징을 주어 그들이 행한 역할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수태고지 :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에 쓰여 있는 일화 가운데 하나로, 예수의 어머니 소위 성모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이 찾아와 성령에 의해 처녀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고 고하고, 또 마리아가 그것에 순명하고 받아들인 사건을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아름다움과 겸손함, 광야에서 해방된 예언자 세례 요한의 엄숙하고 힘찬 몸짓, 그리고 기쁨과 놀라움으로 서로 조용히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천사들. 도나텔로가 성경의 장면을 표현한 새롭고 극적인 방법이 그 전시대의 자랑거리였던 명료한 배치 방식을 뒤엎어 높은 반면 자랑거리였던 명료한 배치 방식을 뒤엎어 놓은 기베르티는 보다 명료하고 절제 있게 표현하고자 세심한 배려를 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도나텔로가 목적으로 했던 실제 공간에 대한 개념은 주지 않았다. 그는 단지 깊이의 암시만을 주어서 그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호한 배경과 대조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기를 원했다. 기베르티가 당대의 새로운 발견들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고딕미술의 이념에 충실했던 것처럼 피렌체 부근 피에솔레의 위대한 화가 프라안젤리코도 주로 종교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들을 응용했다.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로서 그가 1440년경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프레스코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한다. 그가 각 수도사들의 방과 복도 끝마다 그려 놓은 성화들을 감상하며 이 오래된 건물의 정적 속을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걸어가다 보면 이러한 작품들을 구상했던 그런 정신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가 어느 수도사의 방에 그려놓은 수태고지 그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원근법을 구사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즉각 알 수 있다. 성처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회랑은 마사초의 유명한 프레스코의 둥근 천장만큼 실감 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벽에 구멍을 뚫는 것이 프라 안젤리코의 주된 의도는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다.
14세기 시모네 마르티니처럼 그는 단지 성화를 아름답고 단순하게 그리고 싶었을 뿐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에는 거의 운동감이 없으며 실재의 단단한 인체를 암시해 주는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이 위대한 미술가의 겸손함이야말로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가 미술에 도입했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근대적인 새로운 표현법을 과시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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