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브루넬레스키

러블리 리리 2024. 6. 19. 18:03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술의 영역에 있어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그 뒤 수백 년간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축법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고전기의 미술가들 중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길이 지평선 상의 한 점으로 사라지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미술가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을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이것이 그의 화가 친구들에게 불러일으킨 흥분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러한 수학적인 법칙에 근거하여 그려진 최초의 그림 중 하나는 마사초 <성삼위일체, 송모성 요한과 헌납자들>이다. 이것은 피렌체의 어느 교회에 있는 벽화로 삼위일체와 십자가 아래상인 부부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그린 화가는 마사초라는 사람이데 마사초는'어줍은 톰마소'라는 뜻이다. 그는 대단한 천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28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당시 회화에 있어 완전한 혁명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비록 원근법이 새롭게 등장했던 당시에는 그서 자체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을 테지만 이 혁명은 기법적인 수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 벽화가 제막되어 마치 벽에 구망을 뚫어놓은 듯이 보이는 그곳에서 피렌체 사람들이 당시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양식에 따른 새로운 납골당을 보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이 새로운 건물 안에 배치된 인물상들의 단순함과 장엄함에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에 피렌체 사람들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피렌체에서도 유행했던 국제양식 같은 것을 기대했다면 틀림없이 실망했을 것이다. 그들이 본 것은 섬세한 우아함이 아니라 큼직하고 육중한 인물들이었으며, 유려한 곡선이 아닌 건장하고 모가 진 형상이었고, 꽃이나 보석과 같은 고상한 세부 묘사 대신 유해를 안치하는 황량한 지하 납골소였다. 그러나 마사초의 작품이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림들보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덜 주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훨씬 더 진지하고 감동적인 것이 있었다. 우리는 마사초가 조토를 모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극적인 장엄함을 찬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모가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손으로 가리키는 단순한 제스처는 엄숙한 이 그림 전체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대단히 웅변적이고 인상적이다. 이 그림의 인물상들은 산실 조각상처럼 보인다. 마사초가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효과였다. 우리는 손으로 그들을 만져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 느낌이 이인물들과 그들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에게는 미술에 관한 새로운 방법과 발견이 언제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런 방법과 발견을 매게로 하여 그 주제가 갖는 의미를 보는 사람이 보다 친근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브루넬레스키의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피렌체의 대가 도나텔로였다. 그는 마사초보다 나이가 15살이나 많았지만 더 오래 살았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그의 초기 작품중 하나이다. 이것은 무기 제조자들의 조합이 주문한 것으로 그들의 수호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를 묘사한 것으로 피렌체의 한 교회 외부의 벽감 속에 세워두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것과 대성당들의 외부를 장식했던 고딕 식 조각상들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도나텔로가 얼마나 완전하게 과거와 결별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고딕 조각상들은 현광 양쪽에 조용하고도 엄숙하게 열을 지어 서성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마치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상은 한치라도 양보하지 않을 결심을 한 사람처럼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고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중세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던 망연하고 고요한 아름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활력과 집중감으로 넘쳐 있는 것만 같다. 방패 위에 손을 얹고 마치 적이 접근해 오는 것을 주시하는 듯한 그의 모든 태도는 도전적인 결의로 긴장된 것처럼 보인다. 이 조각상은 젊음의 혈기와 용기를 매우 탁월하게 표현한 모습으로 지금도 업급될 만큼 유명하다. 우리는 도나텔로의 이러한 상상력뿐만 아니라 이 무사다운 성인을 이처럼 신선하고 신빙성 있게 시각화한 그의 탁월한 재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조각 예술에 대한 그의 전체적인 접근방법도 완전히 새로운 착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상은 그것이 풍겨주는 생명감과 운동감에도 불구하고 그 윤곽이 분명하고 바위와 같이 단단하다. 마사초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도나텔로는 그의 선배들의 우아한 세련미를 새롭고 힘찬 자연의 관찰로 대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도나텔로는 생존 시 굉장한 명성을 덩었다. 백 년 전의 조토와 같이 그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불려 다니며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더움 빛나게 만들었다. 성게로르기우스보다 약 10년 뒤 시에나 성당의 세례반을 위해서 만든 청동부조이다. 중세 세례반처럼 이것도 세례요한의 생애 중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살로메 공주가 헤롯 왕에게 춤을 춘 대가로 성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하여 그것을 받는 끔찍한 순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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