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성의 정복, 르네상스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재생이라는 관념이 이탈리아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은 조토시대 이후의 일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시인이나 화가를 칭찬하고 싶을 때는 그의 작품이 고대의 것만큼 훌륭하다고 말했다. 조토는 이런 식으로 미술의 진정한 부활을 유도해 낸 거장으로 칭송되었다. 즉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미술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술가들이 칭송했던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의 걸작만큼 훌륭하다는 의미에서 이런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이탈리아에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 인들은 먼 옛날에는 로마를 수도로 한 자신들의 나라가 문명 세게의 중심이었는데, 고트 족과 반달 족 같은 게르만 종족이 침입해 와서 로마 제국을 붕괴시킨 이래로 그 권세와 영광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인들의 마음속에 품은 부흥이라는 관념은 '위대했던 로마'의 재생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다보는 고전 시대와 그들이 이제 희망하는 재생의 새로운 시대 사이에 놓인 기간은 단지 하나의 슬픈 막간, 즉 '중세 시대'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 재생, 즉 르네상스라는 관념은 그 중간의 시대가 '중세'라는 관념을 낳게 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 족 때문에 로마 제국이 몰락 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물건들을 쓸데없이 파괴하라는 짓을 가리킬 때 반달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중간시기의 미술을 고딕미술이라 부르고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탈리아 인들의 이러한 생각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기껏해야 실제적인 역사의 흐름에 대한 거칠고 매우 단순화된 상황파악에 불과할 뿐이다. 앞에서 우리는 고트 족의 로마 침입으로부터 우리가 지금 고딕양식이라고 부르는 미술이 생기기까지는 대략 7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는 미술의 부활이 암흑 시대의 충격과 혼돈 뒤에 서서히 진행되어 오다가 고딕시대에야 급속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북쪽에 사는 사람들보다 미술의 이러한 점진적인 성장과 개화를 인식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세의 이탈리아는 다른 지역보다 낙후되었기 때문에 조토의 새로운 업적들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혁신으로 보였고, 예술에 있어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모든 것의 부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4세기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고전시대에 번창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이 거의 다 북쪽의 야만인들에 의해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이 영광스러운 과거를 다시 부흥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과 희망이 강하게 나타난 곳은 단테와 조토의 출생지이며 부유한 상업도시인 피렌체였다. 바로 이곳에서 15세기 초 일단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미술 개념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당시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대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고딕 성당으로 브루넬레스키는 고딕 전통의 일부를 형성하는 기술적인 창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명성은 궁륭형 천장을 만드는 고딕 식 방법을 알지 못했으면 불가능했을 구성과 설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의 성당을 거대한 돔으로 덮기를 원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이런 돔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낼 때까지 이 돔을 받쳐주는 기둥들 사이의 거대한 공간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새로운 교회나 다른 건물의 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전통적인 양식들은 모두 다 버리고 로마의 영광이 부활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시안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로마를 여행하여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측량하고 건물들의 형태와 장식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이런 고대 건물들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 이런 건물들은 15세기 피렌체의 요구에는 채택되기 힘들었다. 그가 목표했던 것은 새로운 건축방법의 창조였으며 그러한 의도 내에서 고전 건축의 형식들을 새로운 조와와 미를 창조하는데 자유로이 이용하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업적 중에서 가장 놀러운 것은 그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실제로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거의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가든 열주나 박공과 같은 고전적인 형식을 이용한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몇몇 건축가들이 브루넬레스키의 방침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브루넬레스키가 고딕 전통에 반기를 든 것처럼 르네상스 식 전통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금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현재 건축되고 있는 대부분의 주택들, 심지어 원주나 그의 비슷한 장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물에까지도 아직 문이나 창틀의 쇠시리 장식에서, 또는 건물의 치수와 비례등에서 고전적 형식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브루넬레스키가 새로운 시대의 건축을 창조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는 분명히 성공한 셈이다.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의 명문가인 파치가를 위해서 지은 작은 예배당의 정면인다. 우리는 한눈에 이 건물이 고전적인 신전과 거의 공통점이 없음을 알 수 있지만 고딕 건축가들이 사용했던 형식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게 된다. 브루넬레스키는 원주와 벽기둥과 아치를 자기 식대로 결합해서 그 이전의 건물과는 전혀 다른 경쾌하고 우아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고전적인 박공을 가진 문틀과 같은 디테일을 보면 브루넬레스키가 얼마나 주의 깊게 판테온과 같은 고대의 유적을 연구했는지 알 수 있다. 아치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으며 그것이 벽기둥이 나 있는 위층에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비교해 봐라.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가 로마의 형식들을 어떻게 연구했는지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밝고 균형이 잘 잡힌 실내에서는 고딕 건축가들이 그처럼 높이 평가했던 특징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높은 창문도 없으며 가느다란 기둥도 없다. 그 대신 건물의 구조상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않지만 고전기의 '기둥양식'을 본뜬 회식 벽기둥들이 아무 장식도 없는 흰 벽을 구획하고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다만 내부의 형태와 비례를 강조하기 위해 벽기둥을 거기에 설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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