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취향은 장대한 것보다는 세련된 것을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건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국에서는 소위 '초기 영국양식'이라 알려진 초기 대성당들의 순수한 고딕 양식과 이런 형식들이 발전하여 그 후에 생긴 소위'장식적 양식'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구분된다. 그 명칭 자체가 취향의 변화를 말해준다. 14세기의 고딕 양식 건축가들은 벌써 초기 성당의 분명하고 장엄한 외관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식과 복잡한 트레이서리를 통해서 그들의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엑서터 대성당의 서쪽 창문이 이 양식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교회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건축가들의 주된 과업은 아니었다. 나날이 발전하고 번창하는 도시에서는 시청 청사라든가 조합 사무실, 대학, 궁전, 다리와 성문 등 과 같은 많은 세속적인 건축들이 필요했다. 이런 종류의 건물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특징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베네치아에 있는 도제궁인데 이 건물은 베네치아의 권세와 번영이 최고에 달했던 14세기에 착공되었다. 이 건물은 고딕양식의 발전이 후기에 이르러 장식과 트레이서리에 많은 비중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장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4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조각 작품들은 그 시대의 교회를 위해서 만들어졌던 수많은 석조물들이 아니라 당신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귀금속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들 이었다. 프랑스의 한 금세공사가 은에 금도금을 하여 만든 작은 성모상을 보면 공중의 예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기도를 올리기 위해 대 저택의 예배실에 안치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성당의 조각품들처럼 엄숙한 추연함 속에서 진리를 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움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파리의 이 금세공사는 성모를 진짜 어머니로, 그리고 예수를 어머니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는 실제의 어린아이로 생각했다. 그는 딱딱하고 엄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가 이상의 전체적인 윤곽을 약간 휘게 만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모는 아기 예수를 안기 위해서 팔을 엉덩이에 받치고 머리는 아기 예수 쪽으로 약간 숙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 몸 전체가 s형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당시의 고딕 미술가들은 이와 같은 모티프를 대단히 좋아했다. 사실 이 조각상을 만든 미술가도 성모의 특이한 자세나 그녀와 놀고 있는 아기 예수의 모티프를 처음 고안해 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당시의 일반적인 유행의 추세를 따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의 공적은 정교하게 처리된 모든 세부 묘사나 손의 아름다움, 아기팔에 나와있는 작은 주름살, 금도금한 은과 에나멜의 놀라운 표면처리,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길고 가느라단 몸에 얹힌 머리에서 볼 수 있는 이 조각상의 정확한 비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세기 화가들이 우아하고 섬세한 세부묘사에 대한 집착은 '메리여왕의 기도'라고 알려진 영국의 기도서와 같은 유명한 필사본들에서 엿볼 수 있다. 박식한 유대의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성전의 예수'를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를 높은 의자 위에 올라앉혀 놓았는데, 예수는 중세 미술가들이 설교사를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특징적인 손짓으로 교리의 요점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다. 율법학자들은 두려움과 놀라는 자세로 손을 들고 있으며, 방금 그곳에 도착한 그리스도의 양신도 서로 상대방을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며 손을 들고 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법은 다소 비형실적이다. 성경에 의하면 당시 예수는 열두 살이나 어른들과 비교해서 너무 작게 그려져 있고, 또 인물들 사이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마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너무 경외한 나머지 그의 사실적인 관찰에 대한 것을 그림에 도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과 같이 우아한 설명과 충실한 관찰이라는 두 요소들이 점차 하나로 융합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아마도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풍조가 그렇게 빨리 이루어 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에서는 조토의 미술이 회화의 모든 개념에 변화를 일으켰다. 고대 비잔틴 양식이 갑자기 딱딱하고 구식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 미술이 유럽의 나머지 지역과 갑자기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는 반대로 조토의 개념은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서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반면에 북쪽의 고딕 화가들은 남유럽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들 북유럽 미술가들의 취향과 양식이 대단히 깊은 영향을 준 곳은 또 하나의 토스카나 마을로 피렌체의 적수였던 시에나에서였다. 시에나의 화가들은 피렌체의 조토처럼 갑작스럽고 혁명적인 방법으로초기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조토와 같은 세대로 시에나의 거장인 두초는 고대 비잔틴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시모네 마르티니와 리포 멤미가 그린 제단화는 일반적인 분위기가 어느 정도까지 시에나의 미술에 흡수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수태고지를 묘사한 이 그림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늘에서 내려와 성모 마리아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인데 가브리엘이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라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그의 입 주위에 그 말을 직접 써놓았다. 그의 왼손에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가 들려 있고 오른손은 마치 말을 시작하려는 듯한 자세로 들고 있다. 그녀는 두려움과 겸허한 몸짓으로 움츠리면서 하늘에서 온 사자를 돌아보고 있다. 둘 사이에는 처녀성의 상징인 희 백합이 꽂힌 꽃병이 놓여 있고, 중앙의 뾰족한 아치 밑에는 성신의 상징인 비둘기가 네 날개를 가진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 거장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미술가들과 마찬기지로 섬세한 형태와 서정적인 감정을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