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12세기

러블리 리리 2024. 6. 13. 18:00

연대는 역사라는 태피스트리를 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못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1066년이라는 연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점으로 미술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편리한 방법이 될 것 같다. 영국에는 색슨 시대의 건물등 중에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유럽에도 그 시기의 교회가 잔존하는 예는 거의 드물다. 그러나 영국에 상륙한 노르만 인들은 노르망디 및 그 이외의 지방에서 그들 세대 중에 형태를 갖추었던 발전된 건축 양식을 들여왔다. 영국의 새로운 영주가 된 사제들과 귀족들은 수도원과 교회당을 건립해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건물들은 세운 양식은 영국에서는 노르만 양식으로,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양식은 노르만 침략 이후 백 년 이상이나 번창하였다. 

교회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오늘날의 우리가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단지 우리는 시골의 몇몇 옛 마을에서 겨우 교회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는 그 부근에서는 유일한 석조 건물이었으며 몇 마일에 걸쳐서 유일하게 볼만한 건물이었고 멀리서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는 그 첨탑이 하나의 이정표였다. 일요일과 예배가 행해지는 기간에는 마을의 온 주민들이 거기에 만났을 것이고, 이 높은 건물과 주민들이 살았던 원시적이고 초라한 집들과 대조는 가히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마을 전체가 이교회 건물에 관심을 가졌고 또 그 교회의 장식에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경제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오랜시간이 걸리는 교회 건물의 건축은 마을 전체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돌을 채석해서 그것을 운반하는 일, 적당한 골조를 세우는 일, 그리고 먼 고장의 소식을 전해주는 떠돌이 장인들, 이모 든 것이 아득한 옛날에는 큰 사건이었다.

암흑시대라고는 해도 최초의 교회로 사용된 바실리카의 기억과 로마인들이 그들의 건축에 사용한 양식이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다. 후진과 성가대석에 이르는 중앙의 신랑, 그리고 그 양쪽의 이중 또는 사중의 측량으로 이루지는 평면 설계는 그 이념과 다름이 없었다. 이 간단한 평명설계를 몇몇 부속물을 붙여서 화려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어떤 건축가들은 교회를 십자형으로 짓는다는 발상에서 성가대석과 신랑 사이에 '수랑' 이라고 불리는 것을 첨가했다. 그러나 이들 노르만 양식의 교회, 즉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의 일반적인 인상은 옛날 바실리카와는 대단히 달랐다. 초기의 바실리카에는 수평의 '엔타블레이처'를 받쳐주는 고전적인 원주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로마네스크나 노르만 식 교회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육중한 각주가 받쳐주는 둥근 아치 들이다. 이런 교회들이 주는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인 인상은 중후한 힘이다. 이런 교회건물에는 장식도 거의 없고 창문도 몇 개밖에 없었으며 중세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잇단 벽과 탑뿐이었다. 

이교도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얼마 전에 개종한 농민과 전사들의 땅에 세워진 이 강력하고 거의 도전적인 석조 건물들은 바로 전투적인 교회라는 관념, 즉 이 지상에서 최후의 심판날 승리의 여명이 밝을 때까지 암흙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이 교회의 의무라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교회 건축과 관련해서 모든 훌륭한 건축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 인상적인 석조 건물에 어울리는 석조 지붕을 올리는 것이었다. 바실리카 성당에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목조 지붕은 위엄이 없고 불이날 경우 쉽게 타버릴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큰 건물에 궁륭을 올리는 로마의 기술은 이미 대부분 잊히고 만 대단히 엄청난 양의 기술적인 지식과 계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1세기와 12세기는 끊임없는 실험의 시기가 되었다. 

주 신랑의 전체 폭을 궁륭으로 덮는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강에 다리를 건치는 것처럼 신랑의 양쪽 기중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들 다리의 아치를 떠받치게 될 엄청나게 큰 기둥들이 양편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궁륭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견고하게 접합을 시켜야 하고 또 거기에 필요한 돌의무게가 엄청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처럼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려면 벽과 기둥들을 더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초기의 터널식 궁륭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양의 석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노르만 건축가들은 이와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붕 전체를 그렇게 무겁게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로지르는 몇개의 단단한 아치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를 가벼운 재료로 메우면 충분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기둥들 사이에 아치나 늑대를 서로 엇갈리게 걸쳐놓고 나서 이 늑대사이에 삼각형 부분을 메우는 것이었다. 얼마 안 가서 건축방법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이 방상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노르만 양식의 더럼 대성단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노르만 정복직후 이 대성당의 호사스러운 내부공간을 덮는 최초의 늑대 궁륭을 고안해 낸 건축가는 그것의 기술적인 가능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에 조각 작품들로 장식을 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에서 였다. 여기에서의 장식이하는 말은 오해를 낳기 쉽다. 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은 제각기 명확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고 또 교회의 가르침과 관계된 명확한 관념을 표현해야만 했다. 남프랑스의 아를에 있는 12세기말의 성 트로핌 대성당의 현관은 이양식의 가장 완전한 예중의 하나이다. 이현태는 로마의 개선문의 원칙을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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