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시대를 위이은시대, 즉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암흑시대라는 명예스럽지 않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이 시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민족의 대이동과 전쟁, 봉기로 점철된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암흑 상태에 빠져서 그들을 인도할만한 지혜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유럽의 제국들이 대략 형태를 갖추고 생겨나기 이전의 혼란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대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기를 명확하게 한계 지을 수는 없으나 논의상 대략 500년 경 보트 10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500년이라면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오랜 기간이며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는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서로 다른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된 상태이고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에야 그러한 칼들이 겨우 마무리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암흑시대의 역사를 약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하등 놀라울 게 없다. 이 시기는 단지 암흑기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과 계급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뒤죽박죽의 시대였다. 이 500년 동안에도 특히 수도원과 수녀원에는 계속해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남녀들이 있었고 이들은 도서관과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고대 세계의 작품들에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 학식 있고 교육받은 수도사나 성직자들은 왕국의 궁정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 그들이 그렇게 고대의 미술을 부활시키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들과 예술관이 전혀 다른 북쪽의 무장 침략자들이 새로운 전쟁과 침략 때문이었다. 전 유럽을 기습해서 약탈을 임삼던 여러 튜턴족의 부족들인 고트 족, 반달 족, 색슨 족, 데인 족과 바이킹 족들은 무학과 미술 분야에 있어서 그리스와 로마의 업적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 야만인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들은 야만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낄 줄 모른다거나 그들 나름의 고유한 미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 중에는 정교한 금속세공을 하는 장인이나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의 장인들에게 비길 만큼 탁월한 목공예가들도 있었다. 용들이 몸을 꼬고 있거나 새들이 신비스럽게 얽혀있는 것 같은 복잡한 문양을 좋아했다. 우리는 이러한 문양들이 7세기에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튜턴 족들의 이러한 예술관이 다른 지역의 원시 부족들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형상들을 미술을 행하고 악귀를 내쫓는 수단으로 생각했다고 판단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바이킹 족의 썰매와 배에 있는 용의 조각상들이 이 미술의 성격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처럼 위협적인 괴물의 머리가 단지 순수한 장식 이상의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사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족에는 배가 고향 항구에 들어가기 전에 그 배의 선장은 대지의 정령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형상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켈트족의 아일랜드 색슨족의 잉글랜드의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이러한 북방민족 장인들의 전통을 기독교 미술에 응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 지방의 장인들이 사용했던 목조 건물을 모방해서 교회와 첨탑들을 돌로 건축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가장 성공적인 놀라운 업적은 7세기와 8세기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필사본들이었다. 700년 직전에 노섬브리아에서 만들어진 유명한 린디스판 복음서의 한 페이지에 서로 뒤엉켜 있는 용과 뱀들로 이루어진 밑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풍부한 레이스 문양으로 된 십자가 가 있는데 그 바탕은 십자가보다 한층 더 복잡하게 되어있다. 이 뒤엉킨 형태들의 실마리를 눈으로 더듬어서 풀어보는 일은 흥미진진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결과가 번잡하지 않고 각기 다양한 문양이 서로에게 엄격하게 대응하며 디자인과 색채의 복잡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면 감탄할 것이다. 이런 복잡한 구성을 어떻게 감히 생각해 낼 수 있었으며 또 이것을 완성시킨 끈기와 인내는 얼마나 대단한가. 이는 이 고유의 토착적인 전통을 몸에 익힌 미술가들의 솜씨와 테크닉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미술가들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필사본의 삽화에 그려놓은 인물상을 보면 더욱 놀랍다. 이것은 인간의 형상과 같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혀앙으로 만든 이상한 문양같이 보인다. 우리는 이 미술가가 옛날 성경에서 찾아낸 어떤 표본을 사용해서 그것을 그의 취향에 맞게끔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로 엉킨 리본처럼 옷의 주름을 변경하고 심지어는 머리카락과 귀까지도 소용돌이무늬로 변형시켰고 전체의 얼굴을 경직된 가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필사본에 그려진 이러한 복음서 저자들과 성인들의 형상은 원시인들의 우상처럼 딱딱하고 괴상하게 보인다. 이러한 그림들은 토착적인 미술 전통 속에서 성장한 미술가들이 기독교 서적의 새로운 요구에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그림들은 단지 조잡하다고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 미술가들은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훈련받은 눈과 손으로 필사본 위에 아름다운 문양을 그릴 수 있었으며 서유럽미술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시킬 수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의 궁정에서 제작된 필사본 성경의 한 페이지로 복음서를 쓰고 있는 성 마테오의 모습은 그리스와 로마의 책에서는 첫 페이지에 저자의 초상화를 싣는 것이 관례였는데 복음서를 쓰고 이쓴ㄴ 이 성인의 그림도 이런 종류의 초상을 매우 충실하게 모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단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토가를 몸에 걸친 모양과 머리를 명암과 색채로 모델링한 방법을 보면 이 중세의 화가가 당신 존중되었던 모범적인 예를 가능한 한 정확하고 훌륭하게 모사하려고 무척 공을 들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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