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 성당을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가는 성인들의 상을 건문의 구조에 딱 들어맞는 단단한 기둥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샤르트르 대성당의 북쪽식의 미술가는 성상들을 하나하나 살아 있는 듯이 묘사했다. 그 성상들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그들이 두르고 있는 옷주름의 흐림도 그 밑에 살아 있는 육체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암시해주고 있다. 조각상들은 성인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분명하게 표시학 ㅗ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것이 누구의 상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앞에 세우고 있는 늙은 사람이 아브라함임을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다. 또한 모세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십계명이 새겨진 명판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하는 데 사용했던 뱀이 감긴 기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왼쪽에 있는 사람은 구약 성경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을 맞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가져온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다. 그는 중세 신학에서 상사를 집전하는 신부들의 모델로 간주되었으며, 성직자들의 성찬배와 향로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위대한 고딕 대성당들의 현관에 모여 있는 조각상들은 거의 다 특유의 상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 의미와 신탁을 충분히 이해하고 묵상할 수 있다. 한 곳에 모여 있는 이조각상들은 앞 장에서 논의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고딕 양식의 조각가가 새로운 정신으로 작업에 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조각상들은 성스러운 상징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진리를 엄숙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각상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옆에 있는 다른 것들과는 그 자태나 미의 형태에 있어서 판이하고 제각각의 개성적인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샤르트르 대 성당은 지금도 대체로 12세기 후반기의 건축으로 알려져 읻사. 1200년 뒤에는 수많은 화려한 대성당들이 프랑스와 그 이웃 나라들인 영국, 스페인, 그리고 독일 라인란트 등지에 생겨 났다. 새로운 장소에서 바쁘게 일했던 대가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초기 건축을 바탕으로 일을 하며 그들의 기술을 배웠으나 그들은 모두 그들 선배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에 자기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것을 보태려고 노력하였다. 13세기 초 스트라스부르의 고딕 식 대성당의 현관인데 여기에는 이 고딕 조각가들의 전혀 새로운 접근 방법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성모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열두 사도들이 성모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성 막달라 마리아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중앙에 있는 그리스도는 그의 팔 안으로 성모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이 조각가가 그 전시대의 엄숙한 좌우 대칭을 유지하려고 여전희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조각가가 사도들의 머리를 아치의 주위에 미리 배치하고 침대 양끄의 사도들은 상호 대칭을 이루도록 했으며 그리스도를 중앙에 배치하기 위해 이 인물군들을 미리 스케치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토판에서 볼 수 있는 12세기의 거장처럼 절 처한 좌우대칭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히 그의 조각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우리는 눈을 치켜뜨고 열심히 쳐다보는 사도들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애도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사도들 중의 세 사람은 전통적인 애도의 표시로 손을 얼굴에까지 들어 올리고 있다. 더욱더 표정이 풍부한 것은 성모의 심상 곁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맞잡고 있는 성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과 몸짓인데 이 조각가는 그녀를 평화스럽고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몸에 걸친 옷도 일찍이 초기 중세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텅 빈 껍데기가 아니며 순전한 장식적인 두루마리도 아니다. 고긱 양식의 미술가들은 그들에게까지 전수되어 내려온 옷을 입을 육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아마 그들은 프랑스에서 더러 찾아볼 수 있는 로마의 묘석이나 개선문 같은 이교도의 석조물에서 이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그들은 신체의 구조가 옷의 주름 아래로 보이게 만드는 잊혔던 고전 예술을 다시 찾았다. 사실 당시 미술가들은 이 어려운 기술을 터득한 그들의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성모마리아의 발과 손, 그리고 그리스도의 손이 옷자락 밑에 드러나 보이게 표현하는 방법은 고딕 시대의 조각가들이 더 이상 그들이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데도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의 위대한 각성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다시 한번 자연을 모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의 형상을 실감 나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 미술과 고딕미술, 즉 신전 미술과 성당미술 사이에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미술가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고딕 미술가들에게는 이 모든 방법과 기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그 목적은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더 감동적으로, 그리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위안과 교화를 받게 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근육을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죽어가는 성모를 쳐다보는 그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함이 틀림없다. 13세기 이르러서 일부 미술가들은 석상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시도에 있어서 한층 더 깊은 발전을 보였다. 1260년경 독일의 나움부르크 대성당 설립자들의 조각상 제작을 위임받은 조각가는 그 당시의 실제 기사들의 모습을 신빙성 있게 전달해 준다. 그가 실제로 실물을 대상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 설립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그에게는 하나의 이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만든 남녀 조각상들은 언제라도 교회의 대좌에서 내려와 그들의 헌신과 고행이 우리 역사책의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힘센 기사들과 우아한 숙녀들 무리에 합세할 것같이 보인다.
13세기 북유럽 조각가들의 주된 업무는 성당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던 반면 당시 북부 화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맡았던 일은 필사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삽화들의 기풍은 엄숙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삽화와는 상당히 달랐다. 만약 12세기의 수태고지와 13세기에 그린 시편 중의 한페이지를 비교해 본다면 그 변화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예수의 매장을 묘사한 것으로 그 주제와 정신에 있어서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부조와 비슷하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인물상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미술가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모는 죽은 예수의 시체 위로 몸을 구부려 그를 껴안고 있으며, 성 요한은 슬픔에 싸여 두 손을 맞잡고 있다. 앞서 본 부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화가가 이 장면을 정해진 틀 속에 맞추려고 고심한 흔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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