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초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미술가들이 이룩한 새로운 발견들은 유럽 전역 파문을 일으켰다.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다 같이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미술에 있어 이 거대한 혁명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곳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 실험과 탐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15세기의 미술을 사로잡았던 이 모험 정신은 중세와 진정한 단절의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민족적인 차이는 중세 전반을 통해 존재하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 차이점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중세 학자들은 모두 라틴어를 말하고 쓸 줄 알았으며 그들이 파리 대학에서 가르친 건 파도바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르친 것과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단절의 영향으로 고려한 것이 하나 있다. 1400년까지 유럽 각지의 미술이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부르고뉴 등지의 지도적인 거장들의 목적이 모두 다 비슷했기 때문에 이 시기 고딕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양식을 국제 양식이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기억하고 있는 바이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그들 사이에 기사도의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이나 봉건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거기에는 그들 자신이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의 옹호자라는 생각을 들어 있지 않았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시민과 상인들로 구성된 도시가 점차 봉건 영주의 성보다 중요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러한 모든 점들도 점차 변해갔다.
그러나 도시들이 큰 세력을 적게 되자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오늘날 노동조합과 유사하다. 길드의 임무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작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기술면에서 완전하게 익힘을 입증해야 했고 자기의 공방을 열 자격이 있고 수습공을 고용해 제단화, 초상화, 채색된 가구, 깃발과 문장 등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상인들은 모두 그들이 태어난 고향의 말을 했고 타국의 경쟁자나 침입자들에게는 일치 단결해서 대항했다. 각 도시는 교역과 산업에 있어 그들 자신의 지위와 특권에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세에는 훌륭한 거장이라면 이 건축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옮겨 다니며 작업할 수 있고, 한 수도원에서 추천받아 다른 수도원으로 갈 수도 있었으며, 그의 국적이 어디인지 물어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미술사에 영향을 미쳤다. 도시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고딕 국제양식은 적어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지 유럽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국제적 양식이었을 것이다. 15세기에는 미술이 각기 다른 여러 유파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지의 모든 도시나 마을에는 그 나름의 회화유파가 생겨났다.
길드와 시 의회는 보통 시의 행정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가장 부유한 집단으로 그들의 도시를 번창하게 만드는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도시를 미화하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피렌체와 다른 도시의 길드들, 예를 들어 금세공사, 모직물업자, 무기 제조자 등의 길드들은 그들 기금의 일부를 교회 설립이나 조합의 건물을 짓는 데 제단과 예배당을 세우는 헌금으로 바쳤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예술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반면 그들은 회원들의 권익을 열심히 보호했으며 따라서 다른 지방의 미술가가 일자리를 얻거나 그들 사이에 정착하지 못하게 했다. 단지 가장 유명한 미술가들만이 때때로 이 저항을 물리치고 대성당들이 건축될 시절에나 가능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일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 당시 젊은 학생들을 다닐 수 있는 미술학교는 없었다. 만약 한 소년이 화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의 아버지는 그를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 밑에 수습생으로 보낸다. 그는 보통 거장의 집에서 먹고 자며 주인집의 심부름도 해야 하고 가능한 모든 면에서 쓸모 있는 일꾼으로 성장해야 했다. 수습생이 처음에 해야 하는 일중의 하나는 스승이 사용할 물감을 개거나 나무 패널이나 캔버스를 준비해 두는 것이다. 점차 그에게 깃대를 그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이 주어지게 된다. 그런 다음 어느 날 스승이 몹시 바쁠 때 그는 수습을 하는 제자에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예를 들어 이미 윤각을 그려놓은 곳에 색칠을 하거나 그 장면에 나오는 구경꾼들의 옷을 마무리하는 그런 일을 주게 된다. 만약 그때 그가 재능을 보이고 스승의 양식을 완전하게 모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점차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당시 15세기 회화의 유파이다. 한 도시의 스승들이 그들의 기술과 경험을 제자들에게 전수해 주는 방법은 이런 도시의 회화유파가 어떻게 해서 그처럼 분명한 독창성을 발전시켰는지 설명해 준다. 15세기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아도 그것이 피렌체의 것인지 또는 시에나인지 디종 또는 브뤼주 쾰른 또는 비엔나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이 엄청나게 다양한 거장들과 유파들 그리고 그들이 시도한 실험들을 한눈에 개관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를 덕기 위해 미술의 위대한 혁명이 시작된 피렌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마사초의 뒤를 이은 다음 세대가 이들의 발견들을 어떻게 이용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것을 어떻게 응용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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