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화가 파올로 우첼로(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 1397년∼1475년)는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원근법의 연구에 몰두한 우첼로는 마사초의 후계자, 또는 원근법의 발명자라고 불리는데, 실제로는 오히려 시적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화려한 색반(色斑)과 풍부한 금을 사용하여 장식적 효과를 높이는 고딕의 전통에 살아온 작가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작품중 가장 보존이 잘된 것은 <산 로마노의 전투> 영국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쟁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피렌체 상인 중 가장 권력 있고 부유한 메디치 가의 대저택 실내 복판에 걸도록 제작된 것인데 피렌체의 역사에 나오는 일화를 그린 것인데 그 이야기는 그림이 걸렸던 당시도 화제였다. 피렌체 군대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벌였던 전투 중의 하나로 1432년 그들의 적을 통쾌하게 짓밟았던 니콜로 다 톨렌티노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이 그림은 매우 중세풍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갑옷에 길고 무거운 창을 들고 마치 마상 경주에 출전하는 것 같은 기사들은 중세의 기사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또한 이장면을 표현한 방법도 얼핏 보기에는 그렇게 현대적이지 않다.
우첼로는 원근법의 발견에 너무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맘낮으로 사물을 단축법으로 그려보고 자신에게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해 보곤 하였다. 그의 동료 화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런 연구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부인이 자러 가자고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원근법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 우첼로는 틀림없이 땅에 흐트러져 있는 여러 가지 무기들을 정확한 단축법으로 그리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말고 사람들이 마치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들처럼 보이고 쾌활한 분위기도 전쟁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만약 말들이 왜 회전목마처럼 보이며 전체 장면도 인형극과 같은 것을 연상시켜 주는지 그 이유를 자문해 보다면 매우 기묘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화가 자신이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너무도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그이 인물들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조각된 것처럼 공간에 돌출되어 보이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가 가장 크게 자부심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땅에 쓰러져 있는 전사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 인물을 단축법으로 묘사하는 일은 가장 힘든 작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상은 그 이전에는 한번ㄴ도 그려진 적이 없었다.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서 너무 작게 보이긴 하지만 이것이 불러일으켰을 파문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기사들이 등장하는 이 장관에서 눈을 돌려 반에이크의 기사 그림이나 랭부르의 세밀화와 비교해 본다면 우첼로가 고딕 전돌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또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북유럽의 반 에이크는 관찰을 통해 얻은 세부사항들을 점차 더했고 또 가장 사소한 음영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모사함으로 형식을 변화시켰다. 반면 우첼로는 접근방법을 택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원근법으로 그림 속의 인물들이 입체감 있고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실감 나는 무대를 구축하려 노력했다. 인물들은 분명 입체감이 살아 있다. 그러나 어딘가 이중 렌즈를 통해 입체경의 영상을 연상시킨다. 심지어 땅에 흩어져 있는 부러진 창들까지도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전쟁이 마치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인위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이와 같은 정영한 수학적인 배치방법 때문이다. 우첼로는 엄격한 원근법적 묘사로 인한 거친 육곽선을 부르럽게 해주는 명암과 공기의 효과를 구사하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국의 국립미술관에 있는 원화를 보면 잘못된 그림이라 느껴지지는 않는다.
프라 안젤리코(기록에 따르면 '이 헌신적인 수도사는 기도치 않으면 붓을 들지 않았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그릴 때면 언제나 볼에 눈물이 흘렀다'고 하는데, '천사와 같은 수도사(Fra Angelico)'이라는 말은 당시 수도사들의 그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고 오늘날도 그렇게 불린다.)와 같은 화가들은 그 나름대로 새로운 방법을 이용하여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채 새로운 기법을 화려하게 응용하였다.
메디치 궁에 있는 개인 예배당의 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은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화풍이 대단히 다른 베노초 고촐리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예배당의 벽면을 세사람의 동박박사가 말을 타고 가는 행렬도로 메꾸었다. 그들은 왕자와 같은 모습으로 쾌적한 풍경 속을 여행하는 것으로 그 그렸다. <베들레헴을 향해 가는 동방박사들>
고촐리에게는 이 성경의 일화가 단지 아름다운 장신구와 화려한 의상, 매혹과 환락의 동화같은 세계를 그릴 수 있는 기회에 지나지 않았다. 앞에서 우리는 메디치 가와 밀접한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부르고뉴에서 귀족들의 유희장면을 묘사하는 취향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보았다. 고촐리는 이 새로운 방법들이 그 시대의 생활상을 묘사한 이런 화려한 그림을 보다 생생하고 유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주려 한 것 같다. 당시 생활은 정말 그림같이 화려한 것이었다.
피렌체 남쪽과 북쪽의 도시에 사는 화가들도 도나텔로나 마사초의 새로운 미술의 의미를 받아들여 어쩌면 피렌체 미술가보다 그것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골몰했던 것 같다. 유명한 대학촌의 파도바에서 작업하다가 그 후 만토바의 영주의 궁전에서 일했던 안드레아 만테냐가 있다. 파도바와 만토바는 모두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도시이다. 조토가 유명한 프레스코를 그렸던 예배당 근처에 있는 파도바의 한 교회에서 만테냐는 성 야고보의 전설을 설명하는 일련의 벽화들을 그렸다. 이 교회는 이차 대전 중의 폭격으로 심한 피해를 입어 만테냐의 벽화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그림들을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는 사형장으로 호송되는 야고보를 묘하하고 있다. 조토나 도나텔로와 마찬가지로 만테냐도 그런 정경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보였을지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가 현실성이라 부른 기준은 조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이 되어 있었다. 조토의 경우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의 내면적인 의미, 즉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행동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반면 만테냐는 외부적인 형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성 야고보가 로마 황제 시대에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광경이 실제로 벌어졌을 장면을 재구성하려 하였다.
그는 고대의 기념물들도 연구했다. 성 야고보가 끌려들어 온 성문은 로마의 개선문으로, 호송하는 군인들도 모두 고전 시대의 기념상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로마 군대의 복장에 동일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 그림이 우리들에게 고대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의상과 장신구의 세부 처리뿐만이 아니다. 이 장면 전체에서 엄격한 단순성과 장대함을 가진 로마 미술의 정신이 넘쳐흐르고 있다. 대략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베노초 고촐리의 피렌체 프레스코와 만테냐의 작품들처럼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반면 만테냐는 마사초처럼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열심히 이용했다. 그러나 우첼로처럼 이마술을 수단으로 해서 얻어지는 새로운 효과를 과시하기 위해 원근법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만테냐는 그의 인물상이 단단하고 형체가 있는 존재들처럼 서 있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무대를 창출하기 위해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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